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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칠정 자세히 읽기> 이상호 지음. 글항아리.

by 동콩 2021. 9. 24.

사단칠정 논변과 관련하여 나온 책들 중에서 그나마 쉽게 쓰려고 노력한 책인듯 합니다. 맹자, 중용, 주자어류를 풀어서 사단이 무엇인지 칠정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려주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원문의 번역이 심각할 정도로 별로입니다. 너무 잘해보려 애써서 그런 것인지 용어와 문장을 풀어보려는 노력이 너무 과한 나머지 도무지 원문의 애초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이고 어떤 번역은 실제 원문과 반대가 되거나 다른 뜻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보입니다.

'책세상'에서 나온 임헌규 옮김의 <사단칠정을 논하다>를 읽어보니 원문의 번역에 상당히 충실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책은 앞서의 <사단칠정 자세히 읽기>에 비하면 읽고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결국 두 책을 같이 읽어보는 것이 좋다고 여겨집니다. '책세상'의 <사단칠정을 논하다>는 빌려보다가 나중에 EBOOK으로 구입하여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리理, 기氣 같은 성리학 용어에 익숙하거나 한자에 익숙하시면 이 책이 더 읽기에 편하실 것 같습니다.

다음은 <사단칠정 자세히 읽기>를 발제한 글입니다.


<사단칠정 자세히 읽기> 이상호 저. 글항아리

 

I. 성리학

 

1. 성립

“춘추전국시대 때의 유교는 형이상학적으로 그리 현란하지 않고 현실적인 학문 체계였다. 이후 진나라 때 발생한 분서갱유로 인해 소실된 유교 경전을 전한 시기에 되살리는 과정 속에서 훈고학이 탄생하였으며, 이후 당나라 때까지 훈고학[1]이 유학의 주류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훈고학은 당나라 때 공영달이 저술한 오경정의가 출판되어 관학화 되자 결국 획일화, 형식화된 학문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당나라 중기~말기 그리고 5대 10국 시대에 이르면, 기존의 유학인 훈고학은 혼란한 시대상황 속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전한 말부터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는 이전까지 중국 사상계에선 주목받지 않았던 여러 형이상학적 논점들을 깊이 다룸으로써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일대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더불어 도교 역시 후한 말부터 재조명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형식화, 획일화된 유학에 대한 문제의식, 당시 사회적으로 많은 폐단을 일으킨 불교와 도교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한 여러 유학자들은 불교나 도교 등에서 여러 형이상학적 요소를 차용함으로써 유학을 재해석하고, 이를 통해 유학을 불교와 도교에 비해 우위를 갖는 학문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유학의 형식화와 획일화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는 송나라 시기 주돈이ㆍ장재ㆍ소옹ㆍ정호ㆍ정이 등으로 대표되는 여러 유학자들이 구체화하였고 이를 주희가 집대성하여 이후 "성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나무위키>

 

북송 시대부터 불교, 도교에 대응하기 위하여 유학자들이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연구하였고 주자가 집대성하여 만들었으며, 이때부터 ‘유학’이 ‘유교’라고 불리어질만큼의 사상적 이론 체계가 갖추어졌다. 심학, 신유학이라고도 불렸다. 용어 등 많은 부분에서 불교와 도교의 사상을 유교화시켰다.

 

2. 리기理氣

“주희에 의해 확립된 이기론은 성리학의 토대가 되는 존재론이다. 리와 기는 본래 짝을 이루는 개념이 아니었으나 중국 송대에 신유학 체계가 정립되면서 세계를 구성하는 두 범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주희는 별개의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리와 기를 대치시킴으로써 자연과 인간을 아우르는 거대한 이론체계를 구성한다. 주희에 따르면 우주만물은 리와 기의 결합으로써 존재한다. 리는 천하의 사물이 ‘그와 같이 이루어진 근거[所以然之故]’이자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법칙[所當然之則]’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기는 그러한 근거와 법칙에 의거하여 현상세계를 구성하는 실질적인 질료가 된다. 리는 추상적인 원리로서 형체를 갖지 않는 존재인 까닭에 현상세계에서 리의 실현은 기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 면에서 존재론적으로 리와 기는 상보적이며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不相離]라 할 수 있다. 반면 리와 기는 각각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의 존재로 그 범주를 달리 하기에 엄연히 구분되어야 하는 관계[不相雜]이기도 하다.” <위키백과>

“리기 개념의 출현에는 불교 화엄종의 ‘리사관理事觀[2]’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작용하였다. 이것은 사실 깊이 연구해 볼 만한 과제이다. 성리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은 불교와 도교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확립된 것이기 때문에 리기 개념이 리사관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성리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성리학의 많은 개념들은 불교에서 차용해왔는데 이 리기론 역시도 불교 화엄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주돈이가 <태극도설>에서, 태극이 움직이면서 음양을 낳고 음양이 오행을 낳으며 만물을 만들게 되는데, 주돈이는 여기서 태극이 리理이고 음양오행이 기氣라고 주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송나라의 유학자들이 해석하여 리기론의 기초를 낳았고 주자에 의해서 정립되었다고 하겠다.

리理와 기氣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에 비유를 할 수 있다.

도화지에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으나 화가의 눈에는 그 안에 그려야 할 구도와 배경, 사물들이 이미 그려져 있다. 이것을 리理에 비유하고, 붓에 물감을 뭍히고 그려내면 그것이 사람의 오관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니 기氣라고 할 수 있다.

화가의 마음에는 완전한 그림이 그려져 있으나 도화지에 표현되는 것은 미숙함과 주변 사정 등에 의해 불완전하게 나타날 수 있다.

 

3. 성정性情

“주자는 이기론을 사람의 마음에 적용해 성리학은 심(心, 마음)의 두 측면인 성(性, 본성)과 정(情, 감정)을 분리하며, 마음은 성과 정을 주재한다(심통성정心統性情)고 주장했다. 주자는 심과 성은 같지 않으며 분리되지 않지만 섞이지도 않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심과 성과 리가 같다고 주장하는 양명학과 갈리게 되는 것.

주자는 성과 리가 같다는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한다. 성性을 순수한 이인 본연지성과 이기가 섞인 기질지성의 두가지로 보는데, 타고난 본성인 '리'가 만인이 따라야 할 보편적 도덕 원리(인의예지)인 본연지성本然之性를 형성하고, 다만 인간의 (기)질의 상이함에 따라 현실로 구현된 성인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사람마다 달라져 사람들의 개성, 열등함과 우수함이 나뉘게 된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나무위키>

 

성리학의 理리라는 것은 완전한 것이고 결함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기氣로 드러날 때에는 불완전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우주 만물의 요소인 이 理氣를 인간의 마음의 영역으로 가져와서 대비한 것이 性情이다. 그러므로 정情을 '감정, emotion'의 의미로 번역을 하면 성리학에서의 情의 의미와 달라진다. 그리고 이 性은 理와 같이 불완전하고 나쁜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주자는 맹자의 ‘성선설’을 채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II. 들어가기 전에

 

1. 사단四端

측은지심(惻隱之心) :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 -> 인仁의 실마리

수오지심(羞惡之心) : 의롭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 의義의 실마리

사양지심(辭讓之心) : 겸손하여 남에게 사양할 줄 아는 마음 -> 예禮의 실마리

시비지심(是非之心) :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 -> 지智의 실마리

이 네 가지로, <맹자> 공손추에 나오는 말이다.

 

2. 칠정七情

何謂人情 喜怒哀懼愛惡欲 七者弗學而能

무엇을 사람의 정이라고 하는가.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하고자 하는 심정이 그것이다. 이 일곱 가지는 배우지 않아도 능한 것이다.

<예기>예운 禮記.禮運에 나오는 말이며, 喜怒哀懼愛惡欲 (희노애구애오욕) 7가지이다.

 

<중용>에도 칠정 중에 4가지가 나오는데,

“喜怒哀樂之未發 謂之 發而皆中節[4] 謂之.

희노애락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고 하고, 드러나서 모두 도리에 맞는 것(中節)을 일러 화和라고 한다.” P.107

 

3. 주자어류朱子語類

주자와 그 문인들이 학문상의 문답을 주고 받은 내용의 책이다. 구어체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 책의 번역문을 재번역 해보았다..

 

性是心之道理, 心是主宰於身者. 四端便是情, 是心之發見處. 四者之萌(움 맹)皆出於心, 而其所以然者 , 則是此性之理所在也.

성性은 마음의 도리이고, 마음心은 몸을 주재하는 것이다. 사단四端은 정이고, 마음이 드러나는 곳이다. 네가지(사단)의 싹은 모두 마음心에서 나오는데 그렇게 되는 이유는 이 성性의 리理가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p.122

 

惻隱、羞惡、辭讓、是非,情也。仁義禮智,性也。心,統情性者也。端,(실마리 서)也。因情之發露,而後性之本然者可得而見。

측은, 수오, 사양, 시비는 정情이다. 인의예지는 성性이다. 마음心은 정情과 성性을 통합해 말하는 것이다. 단端은 실마리이다. 정情이 드러난 이후에 성性의 본연의 것을 알 수 있기(얻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124

 

惻隱羞惡,也有中節、不中節。若不當惻隱而惻隱,不當羞惡而羞惡,便是不中節

측은, 수오는 도리에 맞는 것도, 도리에 맞지 않는 것도 있다. 만약에 측은하게 여기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데도 측은하게 여기는 것과, 수오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데도 수오하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p.146

 

「四端是理之發,七情是氣之發。」問:「看得來如喜怒愛惡欲,卻似近仁義。」曰:「固有相似處。」

"사단四端은 리理가 드러난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가 드러난 것이다."하여, 묻기를 "제가 보아하니 희노애오욕은 오히려 인의仁義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하니, 말씀하시기를 "원래 서로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하셨다. p.148

 

問:「喜怒哀懼愛惡欲是七情,論來(따지다)亦自性發。只是惡自羞惡發出,如喜怒愛欲,恰(마치 흡)都自惻隱上發。」曰:「哀懼是那箇發? 看來也只是從惻隱發,蓋懼亦是(두려워할 출)惕(두려워할 척)之甚者。但七情不可分配四端,七情自於四端橫貫過了。」

묻기를, "희노애구애오욕은 칠정七情이고, 따지자면 역시 성性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단지 오惡는 수오羞惡에서 나오고, 희노애욕喜怒愛欲은 마치 측은惻隱에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자, 말씀하시기를 "애구哀懼는 어디서 드러난 것인가? 보기에 역시 측은惻隱에서 드러난 것 같고, 대개 구懼는 두렵고 근심함이 심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칠정七情은 사단四端과 나눌 수 없고, 칠정七情은 사단四端에서 횡으로 꿰어 지나가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p.149

 

III. 들어갑시다.[5]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성리학자들이 주장하는 논거는 언제나 공자와 맹자 그리고 주자의 말에서 벗어나면 안된다는 것이다. 논변 중에도 이황이 기대승에게 ‘주자를 틀렸다고 말한 나정암의 설과 같다’고 비판하고 기대승은 ‘아니다’고 하며 철회해주기를 바라는 장면이 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이 있다.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은 원론적으로 주자학 내부의 논쟁이다. 주자학의 이론적 구조 내에서 해석 상의 차이로 생긴 논쟁으로, 논쟁의 당사자들 모두 주자학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P.156

보통 사단칠정논’쟁’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 둘 사이의 편지 내용을 보면 ‘서로 강론하여 도를 깨우치기 위함’이 목적이며 이황이 <천명도설>에서부터 얻은 심득을 기대승과의 논변을 통해서 계속 수정하고 완성해 가는 과정이므로 ‘다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에서 이황과 기대승이 주고 받은 내용은 실제 시간 순서대로가 아니라 이 역자의 의도한 바에 따라 편집 되어 있으며 번역 역시도 임의의 손질이 되어 있어서 이 발제문에서는 다른 책[6]의 번역과 발제자의 본인의 미천한 번역을 사용하였다.

둘의 논변을 보면 꾸준히 이황은 ‘옛성현들이 달리 부른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유래所從來가 다르다’고 하며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분별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기대승은 ‘사단, 칠정이 이름만 다를뿐 같은 정情이다’, ‘리와 기로 분리해서는 안된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그 근거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변을 통해 이황은 자신의 주장을 보완, 수정한다. (이후에 <성학십도聖學十圖>를 통해 자신의 이론을 설명한다)

 

이황1

"......이 때문에 지난 번에 "선한 정감은四端은 이치理에서 드러난 정감情이고, 일반 정감七情은 기氣에서 드러난 정情이다"라는 말을 "선한 정감四端은 순수한 이치理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일반 정감七情은 기氣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선함도 있고 악함도 있다."라고 고쳤습니다." p.156

이 번역된 문장은 사실관계에서 틀렸다.

이 논변의 출발은 이황이 정지운(鄭之雲)이 지은 ≪천명도설(天命圖說)≫의 내용 가운데 “사단은 리에서 발현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현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는 구절을 “사단은 이의 발현이고, 칠정은 기의 발현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수정하며 단순한 영역 관계에서 명확한 근거 관계로 정립하였는데 기대승이 이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황은 이를 다시 四端之發 純理故無不善, 七情之發 兼氣故有善惡이라고 수정한 것에서 시작한다.

다른 책의 번역을 보면,

“...공의 따끔한 논박을 받고서 성글고 잘못되었음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즉시 '사단의 발현은 순수한 이치 때문이니 선하지 않음이 없고(四端之發 純理故無不善), 칠정의 발현은 기운을 겸하기 때문에 선과 악이 있다(七情之發 兼氣故有善惡)'라고 고쳤습니다. 이와 같이 말하면 병통이 없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황2

"이것은 이치와 기, 그리고 선한 정감과 일반 정감을 서로 근거 지어 분명하게 말하려고 했던 것이지, 나의 말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P.159

이 내용을 다른 책의 번역을 보면,

“"이는 서로 도와 강론하여 의미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 고쳐본 것이지, 그 말에 결함이 없다고 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라고 되어 있다. 이 번역이 원문에 더 알맞은 듯 하고 뜻이 명확하게 느껴진다. 즉, 본인 말에 오류가 있을지라도 이렇게 카테고리를 만드는 것이 오히려 의미를 밝히는 데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기대승1

(이것은 실제로는 ‘이황2’에 대한 답변이라서 본문 순서인 기대승1, 이황2를 바꾸어 발제문에 올린다.)

1. 지난번 보다는 의미가 분명해졌지만, 여전히 문제가 남아있다..

2.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대립 시킴으로 마음속에 두 가지 정情이 있는 것처럼 말하였다.

3. 비록 정情이 두 가지라고 의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情 가운데 각기 다른 두 가지 선함이 있어서 하나는 리理에서 드러나고 다른 하나는 기氣에서 드러난 것이라고 의심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고봉은 '자사와 맹자가 이론을 정립할 때 취한 용어의 구별에서 사단, 칠정의 구별이 있을 뿐, 칠정 이외에 다시 사단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즉 사단이 비록 순수하게 선하다고 해도, 그것 또한 '감정'이라는 점에서 감정 일반을 지시하는 칠정에 포함되며, 따라서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치의 발현과 기운의 발현으로 나누어 귀속시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사단칠정을 논하다>임헌규 옮김. 책세상. P.153~154

 

기대승2

1. 리理와 기氣는 본래 구분이 있지만 사물에는 섞여 있기 때문에 나누어 놓을 수 없다.

2. 그러나 리理는 약하고 기氣는 강하며 (理弱氣强), 리理는 조짐이 없고 기氣는 흔적이 있기(理無朕氣有跡) 때문에 드러나는 것에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칠정七情이 드러날 때에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성性의 본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3. 그러므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처음부터 결코 두 가지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황3

1. 사단四端은 인의예지의 성性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마음이란 리理와 기氣의 결합인데도 유독 리理 위주로 얘기를 하였다.

2. 칠정七情은 외적 사물이 사람의 형기形氣[7]에 접촉하면 그 환경(境)에 따라 마음이 움직여 발출한다. 칠정에 리理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이런 이유로 주자는 기氣 위주로 말하였다.

3. 그래서 사단四端은 선善한 것이지만, 칠정七情은 선악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未定)이다. 그러니 하나라도 살피지 않으면 마음이 바르지 않을 수 있으므로 그 드러남이 도리에 맞은(中節) 이후에야 화라고 말할 수 있다.

3.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모두 리理와 기氣의 결합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4. 그 유래하는 곳(所從來)에 따라 각각 그 주된 것(所主)과 중한 것(所重)을 가르켜 어떤 것은 리理라 하고 어떤 것은 기氣라고 한다.

 

이황4

1. 같은 정情인데 사단, 칠정이라고 다른 이름이 있을 이유가 있는가?

2. 기대승 당신도 '가르켜 말한 것이 다르다'라고 말하지 않았나?

3. 리理 없는 기氣는 없고, 기氣 없는 리理도 없다. 그러나 '가르켜 말한 것이 다르면' 당연히 구별도 있는 것이 아닌가?

2. 그래서 옛성현들이 이 둘을 논할 때에 섞어 말하지 않고 반드시 분별된다고 말했다.

 

기대승3

이황4에 답변

1.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모두 情이지만 '가르켜 말한 것이 다르기'에 이름이 다를 뿐이다.

2. 그런데 이황 선생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 나온 곳(所從來)이 각각'이기 때문에 '가르켜 말한 것이 다른'것이 되므로 이황 선생과 나의 뜻은 다르다.

 

이황5

1. 그 유래所從來가 다르지 않다면 옛 성현들이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다르다고 했겠나..

2. 공자 문하와 자사[8]는 유래하는 곳의 설명(所從來之說)을 하지 않았지만 맹자가 사단만을 말했을 때에는 '理의 드러남'만 말한 것이다..

3. 그래서 사단四端의 유래所從來가 이미 리理이니 칠정七情의 유래所從來는 기氣가 아니겠는가.

 

기대승4

실제로는 ‘이황3’에 대한 답변

1. 칠정七情은 형기形氣가 외적 사물에 감응한 것이지 리理의 본체가 아니라고 한다면 칠정七情은 성性 이외의 것이 되므로 자사가 말한 화和가 옳지 않은 것이 된다.

2. 1에 따르면 맹자의 기쁨, 순임금의 분노, 공자의 슬픔과 즐거움은 리理의 본체가 아닌 것이 된다.

3. 보통 사람들도 부모나 친척을 만나면 기뻐하고, 다른 사람의 죽음과 질병, 고통을 보면 측은해 하고 슬퍼하는데 이것을 리理의 본체가 아니라 형기形氣로 인해 이뤄진다면 형기形氣가 성性, 정情과는 서로 관계가 없어지니 옳다고 할 수 있는가?

4."정자程子[9]는 "희로애락이 아직 발현하지 않으면 어찌 선하지 않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발현해 절도에 맞는다면(中節) 가는 곳마다 선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단은 본래 선한 것이지만, 칠정 또한 모두 선한 것입니다. 다만 발현해 절도에 맞지 않으면 한편에 치우쳐 악이 되는 것이니, 어찌 아직 정해지지 않은 선과 악이 있겠습니까?" <사단칠정을 논하다> 번역.

 

기대승5

이황이 너무 리理와 기氣를 구분하여 말함으로써 기氣가 리理와 함께 섞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기氣만 따로 가리킨다.

 

이황6

1. 기대승 당신은 사단, 칠정이 유래하는 곳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 리理와 氣를 하나로 여겨(以理氣爲一物) 분별함이 없다.

2. 나정암이 '리理와 기氣는 다른 것이 아니다(理氣非異物)'라고 말하며 심지어 주자의 설이 틀렸다고 하였는데 기대승의 뜻이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 기대승의 주장하는 논거가 주자에게 있지 않은 것이 아니냐?

 

이황7

기대승이,

1. 만약 성性에 대해 논하면, 리理가 기氣 가운데 떨어져 있는 것이며

2. 정情을 논하면, 성性이 기질 가운데 떨어져 있어 리理와 기氣를 겸하고 선과 악이 있는 것이니,

나누어 귀속시키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라고 한 것에 대해서

이황은,

"사람의 한 몸(一身)은 리理와 기氣가 합쳐서 생긴 것이니 두 개가 상호 발현(互發)하고 작용하며, 발현할 때에는 서로를 필요로(相須) 한다. 상호 그 가운데 있으므로 섞어서 말할 수 도 있고, 각각 위주가 되는 것이 있으니 분별해서 말해도 된다.

1. 성性을 논하면, 리理가 기氣 가운데 있지만 자사와 맹자는 오로지 본연의 성(本然之性)을 가르켜 드러냈고, 정자와 장자는 오로지 기질의 성(氣質之性)을 가르켜 논했다.

2. 그렇다면 어찌 정情을 논하면서는 성性이 기질 속에 있지만 각각 발현하는 것에 나아가 사단, 칠정이 유래하는 곳(所從來)을 나눌 수 없겠는가?

 

기대승6

1. 사단四端은 리理에서 드러나고, 칠정七情은 기에서 드러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고 한다면,

2. 리理에서 드러난 것은 어디에서 볼 수가 있으며, 氣에서 드러난다고 하는 것은 리理의 외부에 있는 것이니, 리理와 기氣를 나누는 것은 잘못이다.

3. 나정암의 글과 관련하여, 나는 以理氣爲一物을 말하지도, 理氣非異物을 말하지도 않았다. (이황6에 답변)

 

이황8

1. 사단과 칠정을 주主된 것에 따라서 분속시킬 수 있다.

2. 기대승의 비판을 받은 후에 리理와 기氣가 함께 있다는 점을 인정하여.

"일반 정감이 이치와 기를 겸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명확합니다."p.189

아래와 같이 입장을 수정한다.

3. 사단은 리理가 발현함에 기氣가 따르는 것(四則理發而氣隨之)이고, 칠정은 기氣가 발현함에 리理가 타는 것(七則氣發而理乘之)이다. -> 이황의 호발설互發說의 최종.

 

이황9

1. '이황8'에 대해서 말을 타는 것에 대한 비유

2-1. 사람과 말이 서로 떨어지지 않음을 가지고 사람과 말이 함께 있으니, 사단 칠정이 섞여 있다 말하는 것이 이런 경우.

2-2. '사람이 간다'고 했을 때 굳이 말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말과 같이 가는 것처럼, 사단을 말할 때도 이와 같음.

2-3. '말이 간다'고 할 때 굳이 사람을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도 같이 가는 것처럼, 칠정을 말함도 이와 같다.

 

기대승7

1. 수오해서는 안될 것을 수오하는 경우도 있고, 시비해서는 안될 것을 시비하는 경우도 있듯이, 사단이 발현하는 데에도 도리에 맞지 않을(不中節) 수가 있다.

2. 그러니 사단에도 不善이 있을 수 있다.

3. 사단을 선하다고 하면 인간의 욕망을 하늘의 도리로 잘못 생각하여 그 폐단이 만연할 것이다.

IV. 수양론

 

우리가 흔히 선비라고 부르는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는 사실 ‘도道를 닦는 사람’이다. 리와 기, 태극, 음양, 64괘를 가지고 우주 만물을 탐구하고 성性과 정情을 살펴서 마음을 닦는 자들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수양修養과 그 방법론으로의 정좌靜坐라는 말은 각기 불교의 수행修行, 좌선坐禪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불교와 유교의 그 수행(혹은 수양)의 목적이 다르다. 불교의 수행 목적은 초월주의에 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에 이르러 고苦의 근원인 이 몸을 다시 받아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반해서 유교의 목적은 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하여 ‘공자가 꿈꾸는 이상적 사회를 세우는 것’이다.

성리학 초기에 주돈이는 불교와 도교의 방식에서 ‘마음을 고요히 하는’ 정靜의 방식으로 수양을 하였으나 정자程子는 이러한 방식이 ‘욕망을 끊어 해탈에 이르게 하는’ 불교의 방식이므로 경敬을 중시하는 수양 방식을 말하였다. 정이(정자程子의 한 사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정靜을 말하는 것은 곧 불교의 학설에 빠져드는 것이다. 정이라는 글자를 사용하지 말고 오히려 경敬이라는 글자를 사용해야 한다. 지금 정이라는 글자에 천착하여 말하는 것은 곧 이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성리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이후 주희는 경의 방법을 전면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이황 역시도 이 경敬의 공부를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달아나지 않게’(主一無敵)하여 집중 몰입하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스스로 기만하지 않게’ 마음을 쓰는 수양 방법을 쓴 것이다.

그래서 이황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각각 리理와 기氣로 나누고는 리理이며 순수한 선善 사단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대승 역시도 이후 <사단칠정후설>에서 수양론의 관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일부 수용한다. (그 외의 입장엔 변화가 없다)

“맹자는 사단을 논하면서 “무릇 나에게 있는 사단을 확충할 줄 안다면…”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사단을 확충하려 했으니, ‘사단은 이치의 발현이다’라는 말은 진실로 그러합니다. 정자는 칠정을 논하면서 “감정이 너무 성해 매우 방탕해지면 그 본성이 해를 입는다. 그러므로 깨달은 이는 감정을 절제해 중中에 맞도록 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무릇 칠정이 성하면 더욱 방탕해지기 때문에 절제해 중에 맞도록 하려 했으니, ‘칠정은 기운의 발현이다’라는 말 역시 진실로 그러합니다. 여기에 따르면 사단, 칠정을 이치와 기운에 나누어 귀속시키는 것은 자연히 의심할 필요가 없으며, 사단, 칠정이라는 이름과 뜻에도 진실로 까닭이 있음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단칠정을 논하다>. 임헌규 옮김. 책세상

그리고 기대승은 사단칠정논변 이후 1566년에 이황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V. 그런데 이게 왜 정치적 논쟁이 되나요?

 

이 설명은 <나무위키>에 있는 내용을 올린다.

 

“이 논변은 사실 성리학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매우 고루한 논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이후 조선 정치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는 학설로 발전한다.

먼저, 이기이원론을 주장한 이황과 이를 따르는 동인과 남인의 정치적 입장은 소위 '군주우위설'이다. 원래 동인은 이황의 주 활동지였던, 현재 경상북도 안동 및 영주 지방을 중심으로 등장한다.(참고로 동인과 서인 모두 기반은 서울 경기도에 있었다. 하지만, 많은 경상북도 북부 출신의 유림들이 동인에 참여하였으며, 사실상 동인의 핵심적 기반은 당시 경북지방에 위치했다.) 이황선생의 수제자인 서애 류성룡(이후 임진왜란에서 자신의 친우인 이순신을 등용시키며 큰 활약을 했던)역시도 안동 출신이다. 이들은 지역에서도 보듯이 주 권력집단이 모이던 서울 경기도 지역에서는 먼 곳에서 활동하던 이른바 권력집단에서 배제된 인물이었다. (안동권씨의 세도 정치는 조선말기에 등장하는 사건이니 혼동하지 말도록 하자.)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이 왕권에 의해서 보호받기를 원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남인 학자였던 다산 정약용은 왕권강화에 가장 주력했던 조선후기의 왕 '정조'임을 떠올리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들이 이기이원론을 주장하는 것은 군주우위설이 이에 합당하기 때문이다. 이기이원설은 선함의 근거가 인간의 심정에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부각시킨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윤리적 근거를 자신의 이성과 양심에서 찾아야 한다. 군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군주는 신하의 여러 주장에 윤리적 판단을 의존하기 보다 자신의 윤리적 판단을 보다 신뢰해야 한다. 그래서 군주는 신하의 권력에 좌지우지 되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대비한 이기일원론은 사실상 이황 선생의 제자이기도 한 율곡 이이에 의해서 집대성 된다. 이기일원론은 이와 기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와 기는 명칭에 지나지 않으며, 그 구분은 무익한 것이다. 윤리적 기준은 '윤리적 규범', 즉 문서나 전통 등으로 규격화 되어있고 규범화 되어 있는 형식을 통해서 배울 수 있으며, 윤리적 행동은 그것을 얼마나 잘 따르느냐 이다. 이는 군주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군주도 인간이기에 모든 윤리적 규범을 준수할 수 없고, 다 알 수 없다. 그래서 윤리적 규범을 잘 아는 신하에게 조언을 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명군의 자세이다.

이러한 이기일원론은 조선 정치사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속적으로 가진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 서인 계통의 양반들에게 주로 차용되었다. 그들은 왕이 자신들의 입장을 무시하거나 언급을 듣지않는 것을 가장 꺼렸다. 그들은 되도록 이면 왕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충돌하지 않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하길 바랬고, 실제로 자신들의 입장을 통찰 시키기 위해, 이기일원론을 그 근거로 삼았다.

따라서, 이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의 주장은 조선 유교의 정치적 갈등 관계의 핵심 쟁점이었다. 각 당파들은 이 이론들을 앞세워 정치적 주장을 정당화 했으며, 그것을 토대로 상대방의 논점을 공격하는데 주력했다.” <나무위키>


[1] 훈고학訓詁學. 공자의 유교에서 시작된 갈래로 진나라의 진시황 때 법가사상을 나라 통치 이념으로 통일하는 과정에서 흩어지고 소실된 유교 경전을 정리하고 그 뜻을 새롭게 해석하는 학문.

[2] 화엄종 제4조 징관은 사법계(四法界) 즉, 사법계(事法界), 리법계(理法界), 리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를 제시하였다. 리理와 사事는 불교 이전에 이미 동아시아에 존재하던 개념으로, 인도적 개념인 공(空)과 색(色)을 이해하는 데에 격의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리는 공과 달리 해당 언어체계에서 부정어로 기능하지 않으며 실체론적 일원론의 성격을 띤다.

[4] 중절中節. 적당하여 도道에 어긋나지 아니함.

[5] 이 발제문에서는 용어의 정의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책과는 달리 원문대로 리, 기, 성, 정, 사단, 칠정 등의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6] <사단칠정을 논하다> 임헌규 옮김. 책세상. 이하 ‘다른 책’으로 표기.

[7] 형기形氣: 형상과 기운. 신체와 정신

[8] <중용>의 저자. 공자의 손자이며, 공자의 제자인 증자의 제자.

[9] 중국 송나라의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 ) 두 형제를 말하며 이(二)정자라고도 한다.